2010년 7월 6일 대전지역 여성문화유산 답사
답사중 만난 붉은 인동초~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한밭 문화마당에서 주관하는 제 15회 여성주간기념
대전지역 여성문화유산 답사를 하였다.
문희순 교수님의 안내로...
오전 10시 동춘당을 시작으로
김호연재가 살았던 삶의 흔적을 살펴보고
김호연재 묘소를 들러
고흥류씨 정려각과 쌍청당을 보고
관동묘려에 있는 고흥류씨 묘소도 들르고
전민동에 위치한 서포 김만중 선생의 어머니 해평윤씨의 묘소까지.
무더운 날씨때문에 힘은 들었지만
앞서 살다간 여성들의 삶의 여정을 느낄수 있었던 귀한 답사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져 본다.
1665년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쓴 정려비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면, 측면 각 1칸의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을 놓은 다음 그 위에 8각 장초석을 세웠다. 초석이 높아지면서 자연히 기둥이 짧아졌다.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고 있으며 기둥 상부에서 단면이 둥근 창방을 걸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기둥 상부,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하나씩 짜 올렸다. 공포는 익공식이며 연화, 봉두 등이 조각되어 있다. 내 2출목, 외 1출목으로 내부 살미는 파련문을 조각하여 매우 화려하다. 특히 기둥 사이의 공간포는 출목점차의 하단을 연꽃 주변선 모양의 곡선으로 조각하고 당초문양을 그려 매우 화려하다. 측면의 하인방 아래 부분에는 벽을 두고 하인방과 상인방 사이는 홍살을 끼워 두었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달아 마감하였다. 장초석을 비롯하여 정려각에 쓰여진 각종 재료가 견실하고 조각과 단청이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품격 높은 정려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쌍청당이 있는 중리동 은진송씨 종가집 대문
관동묘려(대전 동구 마산동 96)
고흥유씨의 묘소
묘소의 위치가 우리나라 정중앙선에 위치하고 있단다.
묘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대청호반
김익겸의 처 해평윤씨는 서포 김만중의 어머니다.
김만중(金萬重, 1637년 ~ 1692년)은 조선 문신이자, 소설가이다. 본관은 광산, 호는 서포(西浦)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숙종(肅宗)의 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이기도 하다.
아버지 익겸은 일찍이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에, 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한테서 형 만기와 함께 자상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윤씨는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 아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만중은 형 만기와 함께 오직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고 살았고, 윤씨 부인은 두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궁색한 살림에도 자식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다.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등사해 교본을 만들기도 했다. 윤씨 부인은 ≪소학≫·≪사략≫·≪당률≫ 등의 책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연원 있는 가통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김만중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1672년 겸문학·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즉 권력의 정통성 논란에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 1686년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되었다. 1689년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구운몽》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조선 숙종 때 소설 문학 및 서민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김만중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씨남정기》에 대해 당시 인현왕후를 옹호하기 위해서 쓴 정치소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사 속의 《사씨남정기》는 명나라 때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김만중은 주자주의가 지배하는 조선 왕조에서 집권 세력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자주의로 일관했을 법하다. 하지만 훌륭한 가문이라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때문인지, 주자주의에 대한 회의를 내비치기도 하고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당시의 보편 문어였던 한문으로 써야만 글로 여겼던 당대 분위기에서 김만중의 이 같은 자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