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儉而不陋 華而不侈

나의 이야기/나의 이야기

다산초당

송이 2019. 3. 22. 18:12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1762-1836 )이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곳으로

10여년 전 차를 알게 되면서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다산초당이었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 무염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만덕산(408m) 백련사.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라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백련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해탈문


백련사로 향하는 길, 백일동안 피고 진다는 동백나무 숲이 이어졌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 300년이 넘는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차나무과의 동백나무는 상록 교목으로 온대 지방을 대표하는 수목으로

동백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구분되는데

백련사 동백꽃은 대부분 이른 봄에 피어 춘백(春柏)에 해당된다고 한다.


먼저 다산 초당으로 향하였다.


좁다란 오솔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골짜기 사이 제법 넓은 차밭이 펼쳐졌다.



저 멀리 강진만이 보이는 곳,

아직 찻잎의 새순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차잎으로 만든

차 맛은 어떨지 궁굼하기도 하였다.


백련사 주지 혜장(1772-1811)선사는  백련사의 질 좋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시를 지어보내기도 하였단다.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시켜준 이도 혜장선사라 하였다.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길을 따라~



단풍나무의 연두빛 새순이 나오고 있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른 후,

왼편으로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해월루가 있었다.


바다위에 뜬 달이라는 해월루~

2007년 제7회 다산제때 제막식을 하였단다.



해월루에서 바라 본 강진만~


활짝 핀 진달래 꽃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올해 처음 만난 진달래꽃~


오솔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약 1km 정도 걸었다.



천일각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것이라 한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로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1975년 세웠다고 한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으로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 한다.



동암을 내려서니 동백나무 숲 안에 연지석가산과 다산초당이 보였다.


다산 초당의 제1경은 정석, 제2경과 제3경은 약천과 다조,

그리고 제4경은 연지석가산.



연지석가산으로 흘러드는 이 물은

대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산속의 물을 연못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비류폭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였던

선비들의 넉넉함이 엿보였다.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으로

다산이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다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단다.

연못에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귀하게 여겼단다.

또한, 다산은 잉어들의 행동을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도 한다.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적보전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하였는데

강진군은 조만간 짚을 덮어서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목각하였으며

초당안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붉은 동백꽃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웠다.


초당 마루에 앉아 내려다 본 풍경으로

마당에는 다조가 있고 오른쪽으로 서암이 자리하고 있다.


다조는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돌로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다고 한다.

다산은 이곳에다 약천의 물을 떠나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초당에서 연지석가산 쪽으로 난 방문위의 현판  '관어제'

작은 공간이지만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던 다산의 성품이 느껴졌다.


초당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어떨까?


아마도 사시사철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유배생활이었지만 책을 저술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고,

 샘을 파고, 채마밭을 일구고,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초당 주변을 정성스레 가꾸었다는 다산 선생의 긍정적인 면도 엿볼 수 있었다.

 


연지석가산과 동백꽃, 그리고 나~


서암은 다산의 18명의 제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라 한다.



서암에는 다성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단다.




초당 뒤, 언덕의 큰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글씨.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한다.



정석, 글자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본 다산초당



초당 왼쪽 뒷편에 자리한 약천(藥泉)


약천을 못 보고 지나쳐 아쉬웠었는데 초당 왼쪽에서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5분정도 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사진에 담았다.

못보고 왔으면 몹시 서운했을뻔 했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약천은

물이 촉촉하게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단다.


작은 공간에 많은것을 담고 있었던 다산초당이었다.



다산선생이 오르내렸을 길따라 다시 백련사로 향하는 길~


<오솔길 옆 야생 차나무>


"다산과 혜장"

다산이 혜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유배온지 3년이 지난 1805년 4월 17일이었다.

대둔사에서 백련사로 온 혜장이 다산을 몹시 만나고 싶어했고,

다산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혜장을 만나러 간다.

혜장은 비록 승려였지만 유교 경전에 해박하였고

특히 주역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혜장을 만난 다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게 되고

나중에 다산을 알아본 혜장은 다산을 쫓아가 손을 잡아끌었다.

주역을 두고 나누던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되었고

혜장은 다산의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게 된다.

같은 해,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이 아버지를 만나러 강진에 왔지만

주막집 더부살이 신세였던 다산의 입장으로서 숙소가 비좁아 같이 지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혜장은 보은산 고성사에 작은 선방 하나를 마련해주었고

다산은 이 선방의 이름을 보은산방이라 하였다.

혜장은 백련사 부근의 질 좋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보내 달라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시켜준 이도 혜장이었다.

다산에게 혜장은 외로운 귀양살이를 잠시나마 잊게 해준 귀한 벗이었고

혜장에게 다산은 오랫동안 갈망해 온 배움의 갈증을 해갈해 준 스승과도 같았다.

혜장의 호인 아암도 거침없고 직선적인 혜장의 성격을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지라는 뜻으로 다산이 지어주었다.

1811년 혜장은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다산은 그의 죽음에 슬퍼하며 비명을 쓰고 시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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