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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송이 2016. 10. 6. 17:23

10월 5일, 제18호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던 날에 만난 대추를 보며 떠올린 시 한 편.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낱 - 셀 수 있는 물건의 하나하나

 

 

 

2009년 12월 12일 문화일보에 실린 글

 

<대추 한 알의 세계>

  

지난 8월 어느 날, 내 시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 올릴 작품으로 선정됐는데 동의하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붉디붉은 호랑이’란 시집에 실린 ‘대추 한 알’이라는 시였다. 물론 기꺼이 동의했다. 그렇게 그 시의 첫 연이 9월1일부터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 붙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본디는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였지만 제목이 따로 붙지 않기에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로 바뀌었다.

그 뒤로 이 시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인구에 회자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가 품은 뜻이 단순하고 명쾌하기 때문일 터다. 글판에는 시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탓에 인터넷에서 누구의 시인지를 검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시가 11월30일 글판에서 내려졌다. 감회가 없을 수 없어 몇 자 적는다.

시골집을 마련한 뒤 봄가을에는 나무를 심었다. 그 중의 하나가 대추나무다. 대추나무는 아직 가늘었지만 꽃을 피우고 젖꼭지만 한 열매를 매달았다. 풋대추들이 여름이 오기도 전에 비바람을 못 이기고 떨어진다. 떨어지고 남은 푸릇한 것들이 가지에서 붉고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애틋했다. 저녁 이내가 내린 푸른 울안에서 붉은 대추를 바라보는 가을 저녁들이 내 안으로 흘러왔다가 흘러갔다. 그 사이 개들은 새끼를 낳고 새끼들에게 제 젖을 물려 길렀다. 제 안에 생명을 기르고 다음 세대에게 그 생명을 전달하는 게 무릇 생명들의 유일하고도 숭고한 의무다. 매화가 피고 졌다. 감나무 가지마다 찢어질 듯 감들이 매달렸다. 그 감들은 서리를 맞으며 초겨울까지 가지에 남아 있었다. 더러는 산까치들이 몰려와 쪼아 먹고 더러는 덧없이 떨어졌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자라서 제각각 살 길을 찾아 멀리 떠나갔다. 내 삶은 살뜰하지 못했으나 아이들은 저마다 늠름하게 자랐다. 세 아이 중 두 아이가 외국에 나가 있다. 공자는 기린을 보고 울고, 항우는 명마 ‘오추’를 보고 울었다지만 아이들이 품에서 떠날 때도 울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차마 보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누구나 향연을 꿈꾸지만 그 꿈은 아득하고 멀어서 그렇게 외로움의 장기 수배자가 되어 제 상처로 지은 집에 숨어 사는 것은 아닌가. 공자는 덕이 두터운 이는 외롭지 않다고 썼다. 나는 덕이 얇으므로 천지의 신령들과 소통하지 못한 채 외롭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 이때 외로움은 마음의 우생학에서 열성인자에 속하는 감정일 터다.

시골 사는 즐거움을 나무를 심고 기르는 것에서 찾으려 했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떳떳한 일에 속한다. 벽오동, 느티나무, 층층나무, 회화나무, 보리수, 두릅나무, 산벚나무, 반송, 금송, 단풍나무, 구상나무, 매화나무, 영산홍, 모란, 해당화, 배롱나무, 미선나무, 주목, 명자나무, 병꽃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들을 구해 마당과 텃밭 언덕에 심었다. 버드나무와 뽕나무는 내가 심지 않았는데 자라났다. 나무를 심으며 내 안에 아직도 일렁이며 삶을 갉아먹는 미움과 화, 불만과 억울함을 눅이고 잠재웠다. 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용서하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이 나무들과 더불어 내 삶도 시골에 와서 식물적 만개(滿開)를 겪어냈다. 

나무들은 저마다 운명이 있어서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오죽은 심었으나 추위를 견디지 못했는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처음 심은 모란도 살지 못했다. 멀쩡하던 나무도 이듬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도 했다. 심는 나무가 열이면 죽은 나무가 서넛은 되었다.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에너지의 공명이 존재한다. 땅과 공기와 물과 식물들은 자연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사람은 그 자연 에너지 속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다. 


나는 나무에게 말을 걸고 나무가 내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무를 심고 기르며 그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나무들은 내게 여러 편의 시를 주었다. 흙을 파고 뿌리를 묻고 흙을 다진 뒤 물을 주어 살게 했으니 나무들도 그 수고에 보답을 한 것이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를 곁에서 겪은 뒤 ‘대추 한 알’이라는 시는 어느 날 무심히 나왔다. ‘저게 저절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그 시의 두 번째 연이다.

 

 

 

 

 

대추 한 알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다. 작고 하찮은 미물에 속하는 대추 한 알이 성숙해지는 데도 온갖 시련을 견디는 인고가 따른다. 대추 한 알의 둥글어짐에는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이 필요하다. 대추는 그 모든 비바람치는 세월을 품고 견딘 뒤에야 붉고 둥글어질 수 있다. 제가 선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수행자와 같이 이 시련들을 견디고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가 대견하다. 대추나무는 제 모든 것을 바쳐 열매를 얻는다. 그러니까 대추는 시련을 견딘 보람이자 결실인 것이다. 그게 대추나무가 따라야 할 단 하나의 소명이자 꿋꿋하게 세워야 할 도덕이다. 

올해도 우리 집 대추나무에는 대추가 열렸다. 대추나무가 노동자라면 저 열매들은 그 노동의 수고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대추 한 알은 대추나무가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생명의 노래, 우주의 약동, 관능과 번영의 후렴구, 식물들의 정수(精髓)다. 사람들은 이 시를 읽고 고진감래(苦盡甘來)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 삶에도 쓰디씀이 다하면 달콤함이 오지 않던가. 그러니 ‘아낌없이 바쳐라, 그리하면 그게 그대에게 되돌아오리라.’(데이비드 H 로런스, ‘우리는 전달자’) 대추 한 알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삶이란 아낌없이 바쳐서 얻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모란 움 돋듯, 가을 매 하늘에 날듯 더욱 청신하게 살아보아야 하리. 

[[장석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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