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儉而不陋 華而不侈

나의 이야기/나의 이야기

동구릉 & 정약용 유적지

송이 2026. 5. 1. 14:27

2026년 4월 28일(화) 대덕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대덕문화가족 전국역사문화탐방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과 남양주시에 있는 정약용유적지를  다녀왔다.  

마침 강의 일정이 없어 참석할 수 있었고 비소식이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약 450여 년에 걸쳐 조성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었다.  시간이 넉넉치 않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는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매표소 옆에 있던 < 조선태조고황제시비>

 

등백운봉(登白雲峰)

손 당겨 댕댕이덩굴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삼각산(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며 읊은 시라고 한다.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으로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600여 년 동안 제례가 이어지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어서 란다.

 

 

<재실齋室>

 

재실은 평상시 영(종5품) 또는 참봉(종9품)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주요시설은 집무실인 재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단다.

 

 

건원릉이 있는 곳을 향하여 가며 수릉과 현릉을 멀리서 바라다 보았다.

목릉, 휘릉, 원릉, 경릉, 혜릉, 숭릉.

이곳에 있는 다른 릉은 모두 두글자인자 건원릉만 세글자라 하였다.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과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릉인 현릉.

 

 

로봇잔디깎기가 드넗은 잔디밭을 관리하고 있었다.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능으로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이 억새로 덮여 있는데 이는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청완)로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원릉의 봉분 억새는 예로부터 1년에 한번 한식날에 예초를 하였으며 전통에 따라 지금도 한식날 봉분 억세를 베고 고유제를 드리는 '청완 예초의'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건원릉 정자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을 지붕 위에서 봤을때  <丁고무래 정>자를 닮아 정자각이라고 한단다.

정자각을 가는 길은 혼령이 다니는 향로와 임금이 다니는 어로가 있고 정자각을 오를때도 오른쪽으로 올라 왼쪽으로 내려온다고 하였다.

 

왕실제사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낮에 지내고 육류와 어류는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건원릉은 이곳에서 매년 6월 27일, 오전11시에 지내며 2025년에 617주기 제례를 지냈단다.

 

 

계단을 오를때도 오른발 먼저 합보로 오르고 내려올때는 왼발 합보로 내려온단다.

    

 

건원릉은 태조 혼자 묻힌 단릉이라고 한다.  첫왕비는 개성에 둘째왕비는 정릉에 모셔져 있단다.

 

 

비각에는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보물로 지정된 신도비와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한 비 등 두개가 있었다.

 

 

 

숲길은 공기도 맑고 걷기에 좋았다.

 

 

연분홍 철쭉꽃이 반겼다.   예쁘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남양주로 강변도로 따라 30여분 이동하였다.

 

팔당댐~

 

 

해설사 분과 30여분 동행하며 설명을 들었다.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이곳 남양주 마재마을에 태어나고 또 노년이 되어 삶을 마감한 정약용 선생의 고향이었다.

 

 

정약용 선생은 수원화성을 만들때 발명한 거중기와 유형거로 공사비용도 줄이고 공사기간도 크게 단축을 하였단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집과 말년을 보낸 '여유당'이 모두 떠내려가는 바람에 정약용 선생의 자취는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묘소만은 수마를 피하여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약용 선생은 정조가 승하했을때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채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단다.

여유당이란 '겨울 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1980년대 들어서 옛 사진을 토대로 정약용 선생의 고택을 복원하고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을 개관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다 본 풍경....  

 

 

정약용 선생은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일 아침에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는데 따로 지관을 부르지 말고 집 뒷산에 묻어달라 했던 선생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자리 잡았단다.

 

회혼례에서 직접 부인에게 읽어주려고 회혼례 3일전에 지었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 회혼시를 해설사분이 낭송해 주었다.

 

回婚詩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
穠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로)
戚短歡長感主恩(척단환장감주은)

此夜蘭詞聲更好(차야란사성갱호)
舊時霞帔墨猶痕(구시하피묵유흔)

剖而復合眞吾象(부이복합진오상)
留取雙瓢付子孫(유취쌍표부자손)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밤 목란사 소리 더욱 다정하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 霞帔-하피 - 노을 빛깔의 치마폭

다산이 유배지에 있을때 부인 홍씨가 '하피'를 보내 오자 다산이 치마를 이리저리 잘라 그 위에 글을 써 올려 보낸 일이 있다.

하피첩 -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을 담은 서첩(2010년 보물로 지정) - 국립민속박물관

 

 

 

문도사 - 정약용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평상시에는 개방하지 않아 담장밖에서 바라다 보았다.

 

 

30여분 자유시간이 주어져 다산생태공원에 있는 소내나루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열수......

열수(洌水)는 한강의 옛 이름이란다.

 

배타고 소내로 돌아가며 

한강에 외배 띄우니

봄바람에 비단물결 잔잔하여라.

각박한 세상 떠나와 보니

덧없는 인생 위안이 되네.

미음(渼陰)의 숲은 끝이 없고

온조(溫祚)의 성곽은 아름답네

일곱척 조그만 몸으로

경세(經世)를 어찌하겠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팔당호.

팔당호에도 생태학습선이 운행되고 있었다.

 

 

측우대,  혼천의,  혼상...

실학박물관 앞 공원도 잠시 둘러보았다.

 


강의로 바쁜 중에도 봄나들이 잘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