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종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육사 문학관이 있었다.
2004년 7월, 그의 출생지인 이곳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문학관을 개관하였단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았단다.
이육사 시인의 동상과 시비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1904~1944)의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이 문학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 되었으나 소유주가 바뀌면서 원형이 변질되어 생가로서의 기능이 훼손되어 이곳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게 되었단다.
이 집에서 육형제가 태어났으며 육사는 16살 되던 해 까지 살았단다. 육형제의 우의를 기리는 뜻으로 당호를 육우당으로 지었단다.
입장료는 2천원.
10여분 영상을 보고 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라 한다.
우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청포도
두 분 선생님한테 낭독을 해 주기도 하였다.
이육사의 시는 형태적으로 기.승.전.결 4단 구성을 보일 뿐 아니라, 각 연마다 비슷한 형태의 시행들을 엮어 한시의 구조적 특성을 보인다고 한다.
이육사의 어릴때 이름은 원록, 두번째 이름은 원삼, 자는 태경.
1930년 첫 시 <말>을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발표
264, 육사(陸史),
1935년 6월 이후 거의 대부분 이육사(李陸史) 사용.
2층에 있는 문학카페 베란다에서 바라다 본 풍경으로 왼쪽 원안에 이육사의 생가인 육우당이 있었으며 현재는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있다고 하였다.
오른쪽 원안은 왕모산 칼선대가 있는곳이란다.
바위 전망대인 칼선대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쉬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육사 시인이 <절정> 이라는 작품을 완성한 곳이기도 하단다.
칼선대에서는 낙동강이 굽이 흐르는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낙동강이 휘돌아 가는 곳......
해설사분이셨던 문영숙 시인이 올봄 시집을 출간하였는데 10월, 초판 2쇄까지 발행하였다며 기쁜마음으로 <의자들> 디카시집을 선물로 주어 받았다.
다음날 읽어 보았는데 55편의 의자에서 우리들의 이웃들이 보였다.
의자가 시장 주인이기도 하고, 20대 청년으로 보이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되기도 하고 알바생이 되기도 하고,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생각의 전환...... 나도 도전해 봐야겠다~^^
문학관을 나오며 입구에서 본 현판.
수부선행(水浮船行) 물이 배를 띄워 나아가게 한다.
물이 불어야 배가 움직일 수 있듯이 모든 일에는 이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바탕과 조건이 있다.
이육사 동상이 바라다 보는 곳이 왕모산 칼선대라는 것도 알았다.
<절정>의 시상지인 왕모산 칼선대와 <광야>의 시상지인 윷판대는 다음을 기약하였다.
늦은 점심으로 안동시내에 있는 까치구멍집에서 헛제사밥과 안동식혜를 맛보았다.
헛제사밥 중 특이한 것은 상어전, 처음이라 이상할까 싶었는데 담백하고 쫄깃하였다.
경상도 제사음식으로 빠지지 않으며 이곳에서는 돔배기(토막 낸 상어고기)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안동식혜는 고춧가루와 생강의 매콤한 맛과 무가 어우러져 마시는 것이 아닌 수저로 떠 먹는 식혜였다.
매운맛이 생각보다 오래갔다.
두분 선생님과 함께했던 안동 나들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것 같다.
다음에 또 들리자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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